날들

“날들”

깔보았던 게 사실이다. 남루한 옷차림, 촌스런 이름, 어딘가 값이 싸보이는 느낌, 너무 쉽게 볼 수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를 멀리한 이유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내 곁에 놓여진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할 이유는 없었지만, 이유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멋진 경쟁자가 있었으니까.

광고에 나온다. 입은 옷도 녹색을 테마로 한 색감도 멋지다. 멋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힙하다. 이름까지 멋진 놈한테 끌린 건 부정할 수 없다. 당연히 선택은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뒤쳐지지 않으니까. 그래야 남들한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화장품과 한 세트로 내게 온 그 녀석과의 첫 만남은 너무나 부드럽고 오래 갈 것만 같았다.

금방 닳아 없어지는 화장품은 계속 해서 사기가 부담스러웠다. 집에 있는 화장품으로 대체하려 한 순간 그 녀석은 내 얼굴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따갑고, 피가 나고,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했다. 화장품 대신 신발을 자주 갈아 신겨줘야 했다. 그러면서 나가는 돈도 늘어났다. 이미지에 중독이 되어 그와 함께 했지만, 그 이름처럼 모든 면에서 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버리기로 했다.

대체자가 있었다. 2인자. 나에게는 2인자였지만, 나름 세상에서는 엎치락 뒤치락 인기순위 1위 자리를 가져오는 녀석이었다.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내게 주는 이미지는 동일했다. 내가 배신자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욕하지만 않으면, 2인자로 갈아타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첫 느낌은 신선했다. 얼굴에 닿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한 존재의 생에서의 경험과 발전은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나 보다 했다. 화장품은 굳이 필요 없었다. 신발은 여전했다. 다른 게 없었다. 내 얼굴은 세 달에 한 번 쯤은 꼭 상처가 났다.

유명한 녀석들과의 동거는 그렇게 십 수년이 흘렀다. 버리지도 못하고 옮겨 타지도 못한 채 소비는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은품으로 받았던 한 녀석과 출장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동행을 한 사실이 기억이 났다. 몇 달이 지나도 신발 한 번 안 바꾸고도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등짝에 적힌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십 수년 전, 처음으로 나에게 무료로 주어진 그 남루하고 흔한 녀석의 이름이었다. 곧장 마트로 달려가 그 이름을 찾았다. 다행히 아직 1인자와 2인자 곁에 무사히 살아 남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본 뒤 한 세트를 집어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몇 년간 묵혀 있던 1인자와 2인자의 몸뚱아리를 쓰레기통에 쳐던져넣었다. 그리고 남루한 녀석을 꺼내어보니 아직도 패션센스가 특출나진 않지만 뭔가 듬직했다. 화장품 없이도 내 얼굴에 상처 하나 내지 않는 녀석이었다. 2-3주면 갈아줘야 했던 신발은 두 달이 지나도 멀쩡했다. 계속 쓰기 미안할 정도였다. 글이 쓰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런 국산 면도날, 도루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