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법인이야 – 에피소드 #001

10억이다. 최종 결정 통보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피드백 반영 후 최종 업데이트만 잘하면 에이비와 체다는 10억을 투자 받는다. 마흔 즈음이 되어서야 둘이 의기투합해서 세운 스토리 창작 회사는 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출발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는 창작자고 하나는 프로듀서라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둘은 20년 지기 친구라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언뜻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다음의 대화를 들어보자.

“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판타지 창작 어드벤처! 이런 컨셉은 없어. 내가 찾아봤거든? 내일이면 러프하게 한 몇 장 짜리로 쓴 거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애.”

“그런 거 있어. <젠슈>라고 얼마 전에 나온 아니메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데?”

“컨셉 비슷한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근데 내 건 내 이야기잖아. 일단 기다려 봐. 내가 좀 써서 내일 보여줄게. 읽어보지도 않고 비슷한 거 있다고 하지 말고. 내일 보면 느낌 확 올 걸?”

“아니, 그 때 미팅 때 얘기한 거, 그거. 그걸로 하기로 했었잖아. 갑자기 무슨 판타지야.”

“느낌이 안 와. 이건 느낌이 와. 그 때 껀 너무 뭐랄까, 그… 작위적이었달까? 근데 이건 빡! 돈냄새도 나고, 내가 잘 쓸 자신도 빡! 있고.”

“빡치게 하지 말고, 지난 번 걸로 업데이트나 해 와.”

“어차피 내가 쓸 시간 내가 쓴다. 내일까지 딱 기다려.”

“투자사엔 뭐라고 할 건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거기도 완전 설득 가능하지. 그냥 나한테 맡겨.”

체다는 더 이상 대꾸하기 싫다. 이미 투자사에 사업 예정 아이템으로 들어간데다, 피드백도 받아두었고, 예산과 일정표까지 모두 나온 상태이기 때문이다. 손바닥 뒤집듯이 창작물을 뒤집는 에이비가 얄미운 건지, 아니면 자신의 일이 두 배, 네 배가 되어 짜증이 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온 체다는 내일의 대결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모든 질문과 모든 답변에 재차 질문을 던져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논리의 수렁에 에이비를 빠뜨린 뒤, 원안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상을 하니 괜히 늘상은 냉정한 포커페이스인 그의 얼굴에 입꼬리가 씰룩댄다. 이미 정해진 건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만반의 논리를 준비했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는지 금방 잠에 든다.

같은 날 밤 9시, 에이비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 위에 손을 올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화면에 떠 있는 워드프로세서 창은 비어 있다. 담배를 태우러 몇 번 다녀 온 시간을 포함해서 그렇게 1시간 쯤 지났을까? 에이비는 그제서야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한 번 쓰기 시작하니 멈추질 않는다. 진지하게 집중하면 장난끼 가득한 얼굴이 무서운 표정으로 변한다. 새벽 4시. 졸린 기색도 없이 (제목 없음) 이라는 이메일에 아무런 본문 내용도 없이 ㅁㅁㅁㅁ.docx 파일 하나만 딱 첨부해서 체다에게 전송한다. 그리고는 커피를 내리러 주방으로 향한다.

오전 11시. 커다란 커피숍 한 쪽 구석 테이블에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읽어 봤어?”

“400억.”

“무슨 소리야?”

“5배.”

“아, 걱정 마. 내가 설득할게. 여튼, 훨씬 낫지 않아?”

“제정신이야? 80억도 겨우 넘어간 거야. 갑자기 이거 대서사 판타지로 하겠다고 그러면, 누가 다 그냥 넘어가준대?”

에이비는 체다가 또 같은 패턴으로 막는다고 생각한다. 능구렁이처럼 하려던 대답을 이어간다.

“숫자로만 얘기하면 대체 뭘 만들 수 있냐? 설득을 해야지. 설득을. 내가 할게. 좀 믿어 줘라. 뭐, 만들어 보지도 않고 글만 가지고 그러냐. 넌 맨날 그러더라. 재미를 봐. 재미를.”

체다는 에이비의 같은 패턴의 변명에 신물이 나있다. 대꾸도 안 하고 다음 질문을 던진다.

“다음. 이거 누구 보라고 쓴 거야?”

“너?”

“아니, 관객이 누구냐고?”

“아, 남녀노소지. 내 작품은 그런 거 가리지 않아. 아, 물론,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건 다 뺄거야.”

“참 나 원. 너, 우리한테 투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회사인지 알기는 하냐?”

“몽땅스트리밍이잖아.”

“그 회사가 뭐하는데인지는 아냐고?”

“OTT잖아.”

“으후… 거기서 어떤 콘텐츠가 제일 잘 나가는지 아냐는 소리야.”

“신선한 거 하려는 거지, 잘 나가는 거 하면 뭐 똑같은 거나 나오는 거지. 안 그래? 제대로 읽어본 거 맞아? 당연히 지금 게 더 재밌는데. 나머진 나중에 처리하면 되는 거고.”

“야, 있잖아. 이건 약속이야. 너와 나의 약속이고, 우리랑 투자사와의 약속이라고. 하기로 한 거 업뎃 된 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다른 거 던지는 게 말이 돼? 이거 통과 못하면 우리 창업도 여기서 끝이야. 우선 10억은 갖고 시작해야 할 거 아니야?”

체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체다는 인지하지 못한다. 에이비는 카페 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좀, 살살. 조용히.”

체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간다.

“너 이럴 거면 나랑 같이 왜 하자고 했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아이디어로 다 준비 했고, 투자사도 좋다고 했고, 이제 잘만 가면 되는데, 왜 갑자기 난리냐고? 니 하고 싶은 거 하려고 나랑 같이 하자고 한 거야?”

“어째 좀 말이 심하다? 그럼 네가 쓰던가! 서포트는 못해줄 망정,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야? 넌 예전부터 그랬어. 칭찬은 1도 없고 맨날 부정적으로다가 피드백만 써댔지. 그러니 망했지, 안 그래?”

“네가 사업을 알기나 해?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주는 게 사업이 아니야. 정신 좀 차려. 말만 안 했지, 네가 써서 된 게 뭐가 있는데? 뼈빠지게 뛰어서 돈 붙여주면 예술 한답시고 다 날려먹고. 그래서 망한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 이거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 아주 그냥 처음부터 깔려고 작정하고 온 거지? 질문하는 꼬라지를 보니 딱 그렇네. 야, 관두자. 내가 애초에 너랑 사업을 하기로 한 거 부터가 잘못이지.”

“약속이나 지켜. 일은 너만 하냐? 글만 쓰면 그게 그냥 저절로 사업이 되니? 애새끼야, 정신 좀 차려라.”

“뭐, 이 새끼가?”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은 이미 둘에게 집중되어 있다. 카페 매니저는 이미 둘의 테이블 앞에 와있고 내보낼 모양새다.

에이비가 자신의 작업물이 담긴 종이묶음을 낚아 채어 들고 먼저 일어서서 나간다. 체다는 한숨을 쉬며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하다. 파이널 피칭을 앞두고 최종 문서를 보내야 하는 기한은 바로 내일이었다.

체다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약속을 지키는 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은 굳건했다. 투자사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원안의 글들을 고치기 시작한다. 글쓰기에서 손을 뗀지 오래이고, 자신이 쓴 글이 아니다 보니 수정 방향에 갈피를 도무지 잡을 수가 없다. 몇 글자 쓰지 못하고 지우기를 수 백 번. 한 숨을 쉬기를 수 십 번. 결국 주방 찬장에 가서 위스키 한 잔을 타 소파에 털썩 앉는다. 스마트폰으로 채용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한다.

에이비는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신의 창작물의 신선함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그 외 제작의 제반사항들을 채워넣는데 도무지 손을 댈 수가 없다. 담배를 태우러 나가더니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다.

메일 발송 기한인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 업무시간이 다 끝나간다. 한참을 고민하던 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투자담당자에게 메일을 쓴다. 내용인 즉, 추가 업데이트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체다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집에서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간다. 이주일이 지나간다.

마땅한 채용 공고를 찾지 못해 우울하던 금요일의 저녁, 체다는 에이비에게 전화를 건다. 예상대로 받지 않는다. 술 마시고 있으니 생각나면 오라고 장소와 함께 문자를 남겨 놓는다. 소주를 한 병 비웠을 때 쯤은 오후 8시. 에이비가 두리번 거리며 술집으로 들어온다. 에이비는 슬쩍 체다를 확인하고는 이내 다음 병을 까서 소주잔 2개에 가득 채운다. 에이비가 체다의 테이블로 와서 앉는다. 둘은 말 없이 술잔을 비운다. 그렇게 한 병이 순식간에 비워진다. 에이비가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한다.

“여기요, 소주 한 병 주세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소주가 하나 더 올 때 까지 적막이 흐른다. 다른 테이블은 왁자지껄한데도 이 테이블에서는 적막이 터져나간다. 에이비가 술잔을 바라본 채 둘 사이의 음소거를 깬다.

“연락 안 왔지?”

“어.”

“나 때문이지 뭐. 미안하다.”

체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에이비가 다시 묻는다.

“메일 안 보냈지?”

“보냈지. 죄송하다고.”

“나도 보냈는데.”

“뭐라고? 네 맘대로 보내면 어떡해? 언제 보냈는데? 목요일? 금요일?”

“목요일.”

“아, 씨, 나는 금요일에 보냈단 말이야. 대체 뭐라고 보낸 건데?”

“아니, 그냥 네가 안 보낼 거 뻔해서, 그냥 내가 대충 그거 뭐냐 예산이랑 그런 거 해서 보냈지.”

“그걸 네가 했다고? 어떻게 했는데?”

“그게 진짜 뭘 모르고 하려니까 안 되더라고. 그래서 그냥 니 꺼 숫자에 곱하기 2 해서 보냈어.”

에이비의 설명을 듣고 기가 차다는 듯 체다는 한숨을 내쉬며 소주를 들이킨다. 에이비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지? 나 때문이지?”

“솔직히, 뭐, 네가 새로 쓴 게 더 간지나긴 하지.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지. 근데, 약속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뭐 친구끼리 한 약속도 아니고, 투자사랑 한 건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

“나도 알아, 알아.”

서로 한 잔 씩 따라주고 단 번에 들이킨다. 에이비가 자포자기한 듯 묻는다.

“이제 뭐할거야?”

“취직해야지.”

“갈 데는 있고?”

“이 나이에 갈 데가 있겠니.”

“난 아직도 애새끼인가봐.”

체다의 한 쪽 입꼬리가 어이 없다는 듯 씨익 올라간다.

“욕 쳐먹더니 정신 차렸나보네.”

“야, 그래도 너도 그 버릇 좀 고쳐봐. 뭐 전부 자기 방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해야하는 거. 이럴 거면 그냥 네 거 하는 게 맞아.”

“안 써지니까 그렇지.”

“뭐 쓰기는 하니?”

“남의 꺼 피드백 쓸 땐 청산유수로 키보드가 쳐지는데, 글만 쓰려고 하면 전부 무슨 대학생 글짓기 같이 되어버리더라고. 넌 어떻게 몇 시간 만에 그렇게 쓰냐?”

에이비는 너털웃음과 함께 소주 한 잔을 삼킨다. 그리고는 답을 이어간다.

“솔직히 네가 피드백 진지하게 해줄 줄 알았다.”

체다는 답이 없다. 소주 한 잔을 또 벌컥 들이키더니, 가방을 뒤적거려 종이 한 뭉치를 꺼내어 에이비한테 준다.

“뭐냐, 이거?”

에이비는 두 번 접힌 종이묶음을 펼쳐 본다. 목요일에 자신이 썼던 글에 빼곡히 파란색 텍스트로 피드백이 달려 있다. 에이비가 열심히 글을 읽는 사이 체다의 전화기에 알림이 울린다. 체다는 습관처럼 알림을 훑고 바로 잠금을 해제하여 메일 앱으로 들어간 뒤 받은 글을 읽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체다 프로듀서 님.
늦게 회신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보내 주신 최종 업데이트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원안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저희가 보내 드린 피드백과 예산 관련 협의도 되어 있지 않아서 최종 보고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초기 투자 검토 의향을 말씀 드렸을 당시, 에이비 감독님의 크리에이티브와 체다 프로듀서님의 제작의 시너지 효과를 보고 진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내 주신 원안도 아주 좋은 내부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투자를 결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콘텐츠 회사에 대한 저희의 투자는 내용이 아닌 “사람”에게 진행이 됩니다. 애초부터 투자 검토는 두 분을 보고 진행한 것이고, 지금도 두 분에 대한 저희의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약속 드린 전액을 회사에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만, 추가 디벨롭을 보고자 1억 원을 개발비 명목으로 선투자하기로 내부 논의 결과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 내에 새로운 개발을 완성하시면 회사 투자 검토는 재개 가능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괜찮으시면 회신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ㅇㅇㅇ 드림
추신) 에이비 감독님의 새 버전도 좋습니다. 정확한 제작 계획도 함께 업데이트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