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lemental Universe – Episode 5 – “Young-sil 1”
엘리멘탈 유니버스 5화 – “영실이 1”

Elemental Universe – Episode 5 – “Young-sil 1”
엘리멘탈 유니버스 5화 – “영실이 1”

Elemental Universe – Episode 4 – “Magic Wand”
엘리멘탈 유니버스 4화 “요술봉”

Elemental Universe – Episode 3 – “Dad”
엘리멘탈 유니버스 3화 “아빠”

Elemental Universe – Episode 2 – “Rabbit Magic Wand”
엘리멘탈 유니버스 2화 “토끼 요술봉”

Elemental Universe – Episode 1 – “Welcome to Salt Land!”
엘리멘탈 유니버스 1화 “웰컴 투 소금랜드”
“날들”
깔보았던 게 사실이다. 남루한 옷차림, 촌스런 이름, 어딘가 값이 싸보이는 느낌, 너무 쉽게 볼 수 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를 멀리한 이유였다. 노력하지 않아도 내 곁에 놓여진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할 이유는 없었지만, 이유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멋진 경쟁자가 있었으니까.
광고에 나온다. 입은 옷도 녹색을 테마로 한 색감도 멋지다. 멋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힙하다. 이름까지 멋진 놈한테 끌린 건 부정할 수 없다. 당연히 선택은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뒤쳐지지 않으니까. 그래야 남들한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으니까. 화장품과 한 세트로 내게 온 그 녀석과의 첫 만남은 너무나 부드럽고 오래 갈 것만 같았다.
금방 닳아 없어지는 화장품은 계속 해서 사기가 부담스러웠다. 집에 있는 화장품으로 대체하려 한 순간 그 녀석은 내 얼굴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따갑고, 피가 나고,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했다. 화장품 대신 신발을 자주 갈아 신겨줘야 했다. 그러면서 나가는 돈도 늘어났다. 이미지에 중독이 되어 그와 함께 했지만, 그 이름처럼 모든 면에서 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버리기로 했다.
대체자가 있었다. 2인자. 나에게는 2인자였지만, 나름 세상에서는 엎치락 뒤치락 인기순위 1위 자리를 가져오는 녀석이었다. 느낌은 사뭇 다르지만, 내게 주는 이미지는 동일했다. 내가 배신자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욕하지만 않으면, 2인자로 갈아타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첫 느낌은 신선했다. 얼굴에 닿는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한 존재의 생에서의 경험과 발전은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나 보다 했다. 화장품은 굳이 필요 없었다. 신발은 여전했다. 다른 게 없었다. 내 얼굴은 세 달에 한 번 쯤은 꼭 상처가 났다.
유명한 녀석들과의 동거는 그렇게 십 수년이 흘렀다. 버리지도 못하고 옮겨 타지도 못한 채 소비는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은품으로 받았던 한 녀석과 출장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동행을 한 사실이 기억이 났다. 몇 달이 지나도 신발 한 번 안 바꾸고도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은 녀석이었다. 그리고 등짝에 적힌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십 수년 전, 처음으로 나에게 무료로 주어진 그 남루하고 흔한 녀석의 이름이었다. 곧장 마트로 달려가 그 이름을 찾았다. 다행히 아직 1인자와 2인자 곁에 무사히 살아 남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본 뒤 한 세트를 집어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몇 년간 묵혀 있던 1인자와 2인자의 몸뚱아리를 쓰레기통에 쳐던져넣었다. 그리고 남루한 녀석을 꺼내어보니 아직도 패션센스가 특출나진 않지만 뭔가 듬직했다. 화장품 없이도 내 얼굴에 상처 하나 내지 않는 녀석이었다. 2-3주면 갈아줘야 했던 신발은 두 달이 지나도 멀쩡했다. 계속 쓰기 미안할 정도였다. 글이 쓰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런 국산 면도날, 도루코다.
“Rage Against the Road”
삐비빕. 삐비빕. 아침을 깨우는 소리. 평소와 같이 손을 뻗어 스마트폰 알람을 스누즈 시킨다. 이제야 밝아지기 시작한 건 같으니 조금 더 누워있어도 괜찮겠다. 삐비빕. 삐비빕. 이내 다시 깨우는 소리. 손을 뻗어서만은 다시 울릴 것을 알기에 몸을 일으켜 그 알람을 이내 꺼 버린다. 몸이 일어났으니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편다. 위로 길게 뻗은 두 팔과 함께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데 쫘아악 당겨지는 근육의 느낌. 아차 싶다. 인상이 잔뜩 지푸려진다. 목을 돌려보는데 역시나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 완전히 아픈 것도 아니지만 살짝 목이 돌아갈 때마다 목과 어깨에 확 긴장을 주는 이 담결림이라는 현상은 사람의 기분을 망치는데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하다.
탁.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자리를 잘 잡아 앉는다.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힐끗 거릴 때 마다 담이 날 괴롭힌다. 윽 하는 반응은 물론이고 그 즉각적 반응 이후에 바로 이어 아이씨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저절로 나온다. 조심히 스스로와 통증을 잘 참아가며 시동을 걸고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출근길에 오른다.
고속도로 입구 교차로까지는 5분이면 간다. 입구 교차로에서는 신호가 길어 평소에 그 신호에서 멈춘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그 5분 거리의 도로 위 내 앞에는 굴착기가 달리고 있다. 굴착기의 최대 속도가 시속 30km는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내 차의 속도계는 30을 가리킨다. 옆으로 휙 지나가는 동그란 최고속도 안내판에는 6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왕복 2차로 이 도로의 반대편 차선에는 우리 집 방향으로 출근하는 수많은 차들이 줄지어 달린다. 저 멀리 고속도로 입구에 내 신호, 나를 위한 좌회전 신호, 그 긴 신호가 들어온 것이 보인다. 평소라면 아무 문제 없이 고속도로로 올라갔을 그 타이밍이다. 고개가 떨궈진다. 한숨이 나온다. 어느새 교차로에 도달했다. 나의 신호는 시뻘건 색이다. 굴착기는 유유히 직진하여 교차로를 통과한다.
굴착기 운전자는 잘못이 없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와 내 뒤로 거북이 운행을 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3분을 허비했다. 20명이면 한 시간, 한 시간이면 얼마 어치일지 생각하며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2차선 고속도로에 평소 같았으면 합류하자마자 1차선으로 들어가 엑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추월을 즐길 수 있다. 사이드미러를 보니 1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들의 속도와 거리가 끼어들기에 애매하다. 2차선에서 기다린다. 몇 초나 기다렸을까? 2개 차선을 가르는 차선이 점선에서 실선으로 바뀐다. 기다린다. 점선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깜빡이를 넣고 들어가려는 순간 내 뒤에 따라오던 차가 실선을 넘어 1차선으로 건너가 쌩 하고 나를 앞지른다. 살짝 핸들을 틀었다 돌려놓는 통에 담결림이 순간적인 고통을 준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입에선 거친 욕이 조그마한 소리로 흘러 나온다.
그래도 무사히 1차선에 안착했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된다. 오른쪽 차선의 차들이 내 차 뒤쪽으로 하나 둘 멀어져 가는 곁눈의 풍경은 심신에 안정을 준다. 크게 숨을 들이셨다가 내뱉고 편안하고도 익숙한 코스운전에 내 몸을 맡긴다. 그런데 내 차선 저 앞 쪽에 보이는 차 한 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 차가 다가가고 있는 게 포착된다. 쌍라이트를 날릴까? 2차선으로 추월할까? 빵빵 거릴까? 고민하던 찰나 내 발은 브레이크를 밟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내 뒤로 따라오던 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2차선으로 나와 내 앞차를 추월해 간다. 몇 대를 보내는 동안에 입 밖으로 몇 번의 욕을 내뱉었다. 경적이나 상향등의 사용 없이 급가속하는 엔진 소리만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2차선으로 그 차를 추월한다. 다시 내 차선을 차지한 뒤 룸미러로 멀어져 가는 그 차를 보며 온갖 욕을 쏟아 붓는다. 운전면허시험의 난이도를 엄청나게 올려야 한다는 게 스스로에게 내리는 결론이다.
도시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강 양쪽으로 아파트와 빌딩들이 즐비하다. 이제부터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일은 별로 없다. 브레이크로만 전진해야 한다. 항상 막히는 구간. 내가 주목하는 현상은 5차선 그랜드크로스. 오른쪽에서 합류하여 바로 다음 왼쪽에 위치한 출구 때문에 합류하자마자 무작정 왼쪽 차선으로 5번을 연달아 횡단하는 차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내 앞에 여지없이 한 놈이 끼어든다. 욕부터 나온다. 창문을 열어뒀으면 들릴 정도 일거다. 또 한 놈이 끼어든다. 아픈 목을 돌려 사이드미러로 뒷쪽을 보면 그렇게 끼어들어 정체를 만드는 놈들이 그 순간만에도 수 십임을 알게 된다. 그 숫자만큼 욕을 내뱉었다. 횡단을 애초에 막았어야 하지 않은가? 차단봉을 세워서 바로 다음 출구로는 가지 못하게 교통 흐름을 미리 계획했어야 하지 않은가? 단속이라도 하던가? 얼굴이 찌푸려진 게 느껴질 정도로 구겨졌다. 하도 구기고 있어서 미간에 통증이 느껴진다. 이건 이 도시의 탓이다. 행정의 탓이다. 관리자는 한 번이라도 이 도로를 아침에 다녀봤을까? 드는 의문의 숫자만큼 한숨을 쉬어댔다.
도시고속도로에서 나와 일반도로에 진입한다. 이 익숙한 2차선 도로는 흐름을 잘만 타면 쌩쌩 달려 통과할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 지점이다. 출발 때 부터 지금까지 쌓인 미간의 스트레스는 이 때 대부분은 덜어낼 수 있다. 기분 좋게 가속을 하는데 앞에 개인택시 한 대가 차선을 애매하게 물고 중앙에서 간다. 바로 욕이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차선을 왔다리 갔다리 하며 추월하고자 하는 의지를 남들에게 애써 보이고 싶지 않다. 아주 매너 있고 우아하게 방향지시등과 함께 자연스런 추월을 추구하기 때문에 퍼펙트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택시는 1차선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싶더니 제동등이 들어온다. 다시 꺼진다. 제동등이 들어온다. 다시 꺼진다. 까깜빡거린다. 씨발 존나게 짜증이 난다. 나도 결국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야 한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앞 차의 룸미러로는 내 입이 보이진 않을 거다. 소리를 한 번 더 지르고 싶지만 질끈 참는다. 목과 어깨의 근육이 확 당기면서 소리지를 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그 택시를 따라 회사 앞 사거리 교차로에 도달한다. 택시는 1차로, 나는 2차로에 나란히 선다. 나는 옆을 쳐다보지 않는다. 아니, 쳐다보지 못한다.
심호흡을 한다. 우리나라 교통체계와 운전자들의 잘못된 습관을 하나 둘 떠올리며 모든 것이 엉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교차로에서 좌회전은 두 개 차선이 한 번에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마음과 몸을 준비한다. 1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는 차량이 유도선을 무시하고 2차선으로 넘어오는 일에 경적을 때려버릴 속 시원한 준비다. 출발.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그 택시는 교차로에 진입하자마자 유도선을 넘어 내 차선을 거쳐 바로 오른쪽 인도 쪽에 차를 붙인다. 평소 같았으면 길게 경적을 때리고 쌩 하고 지나갔을텐데, 너무 깊숙이 들어와 핸들을 돌려 피하는 순간 담이 확 느껴져 경적 울리기에 실패했다. 사이드미러로 보니 그 택시에서 손님이 내리고 있다. 최고의 순간을 최악으로 날렸다. 욕은 속에서 삭아 머리에 열로 올라온다.
빨간 불에 우회전 대기를 위해 차가 서 있는데 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누가 좀 교통 캠페인이라도 해줬으면 한다. 이경규 아저씨가 다시 양심냉장고를 걸고 고발을 하거나 칭찬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범칙금을 이 백 만원으로 올리고 면허를 다 뺏어버리는 상상을 해본다. 파란 불이 들어온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제발 가라. 제발 가라. 앞 차는 오른쪽 깜빡이를 켜 놓고 교차로에서 꿈쩍도 안 한다. 씨발, 제발 좀 가라고!!!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발을 엑셀러레이터 위에 올리자마자 끝까지 밟는다. 굉음과 함께 앞 차를 받는다. 앞 차 위를 타고 올라간다. 앞 차 지붕과 앞유리를 다 찌그러뜨리고 다시 도로로 내려온다. 차를 도로 한 중간에 세우고 내팽개쳐놓고 내려 나와 내 뒷쪽에 기다리고 있던 아까 그 택시에 달려간다. 운전석 문을 열고 운전자를 끄집어 내어 마구마구 두들겨 팬다. 택시의 사이드미러를 손으로 쳐 부수고, 도로 한 켠에 있던 벽돌을 집어 들어 유리창에 내다 꽂는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리를 내지른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툭. 들고 있던 고개를 내려 보니 아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던 횡단보도 앞 우회전 기다리던 차에 내 차가 살며시 콩 하고 박았다. 앞 차에서 쌍깜빡이가 켜지더니 운전석에서 한 중년남자가 목덜미를 잡고 내린다. 씨발.
10억이다. 최종 결정 통보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피드백 반영 후 최종 업데이트만 잘하면 에이비와 체다는 10억을 투자 받는다. 마흔 즈음이 되어서야 둘이 의기투합해서 세운 스토리 창작 회사는 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출발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는 창작자고 하나는 프로듀서라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둘은 20년 지기 친구라는 사실이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언뜻 이해가 안 갈 것이다. 다음의 대화를 들어보자.
“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판타지 창작 어드벤처! 이런 컨셉은 없어. 내가 찾아봤거든? 내일이면 러프하게 한 몇 장 짜리로 쓴 거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애.”
“그런 거 있어. <젠슈>라고 얼마 전에 나온 아니메야.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건데?”
“컨셉 비슷한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근데 내 건 내 이야기잖아. 일단 기다려 봐. 내가 좀 써서 내일 보여줄게. 읽어보지도 않고 비슷한 거 있다고 하지 말고. 내일 보면 느낌 확 올 걸?”
“아니, 그 때 미팅 때 얘기한 거, 그거. 그걸로 하기로 했었잖아. 갑자기 무슨 판타지야.”
“느낌이 안 와. 이건 느낌이 와. 그 때 껀 너무 뭐랄까, 그… 작위적이었달까? 근데 이건 빡! 돈냄새도 나고, 내가 잘 쓸 자신도 빡! 있고.”
“빡치게 하지 말고, 지난 번 걸로 업데이트나 해 와.”
“어차피 내가 쓸 시간 내가 쓴다. 내일까지 딱 기다려.”
“투자사엔 뭐라고 할 건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거기도 완전 설득 가능하지. 그냥 나한테 맡겨.”
체다는 더 이상 대꾸하기 싫다. 이미 투자사에 사업 예정 아이템으로 들어간데다, 피드백도 받아두었고, 예산과 일정표까지 모두 나온 상태이기 때문이다. 손바닥 뒤집듯이 창작물을 뒤집는 에이비가 얄미운 건지, 아니면 자신의 일이 두 배, 네 배가 되어 짜증이 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온 체다는 내일의 대결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한다. 모든 질문과 모든 답변에 재차 질문을 던져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논리의 수렁에 에이비를 빠뜨린 뒤, 원안으로 돌아가게 되는 상상을 하니 괜히 늘상은 냉정한 포커페이스인 그의 얼굴에 입꼬리가 씰룩댄다. 이미 정해진 건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만반의 논리를 준비했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는지 금방 잠에 든다.
같은 날 밤 9시, 에이비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 위에 손을 올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화면에 떠 있는 워드프로세서 창은 비어 있다. 담배를 태우러 몇 번 다녀 온 시간을 포함해서 그렇게 1시간 쯤 지났을까? 에이비는 그제서야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한 번 쓰기 시작하니 멈추질 않는다. 진지하게 집중하면 장난끼 가득한 얼굴이 무서운 표정으로 변한다. 새벽 4시. 졸린 기색도 없이 (제목 없음) 이라는 이메일에 아무런 본문 내용도 없이 ㅁㅁㅁㅁ.docx 파일 하나만 딱 첨부해서 체다에게 전송한다. 그리고는 커피를 내리러 주방으로 향한다.
오전 11시. 커다란 커피숍 한 쪽 구석 테이블에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읽어 봤어?”
“400억.”
“무슨 소리야?”
“5배.”
“아, 걱정 마. 내가 설득할게. 여튼, 훨씬 낫지 않아?”
“제정신이야? 80억도 겨우 넘어간 거야. 갑자기 이거 대서사 판타지로 하겠다고 그러면, 누가 다 그냥 넘어가준대?”
에이비는 체다가 또 같은 패턴으로 막는다고 생각한다. 능구렁이처럼 하려던 대답을 이어간다.
“숫자로만 얘기하면 대체 뭘 만들 수 있냐? 설득을 해야지. 설득을. 내가 할게. 좀 믿어 줘라. 뭐, 만들어 보지도 않고 글만 가지고 그러냐. 넌 맨날 그러더라. 재미를 봐. 재미를.”
체다는 에이비의 같은 패턴의 변명에 신물이 나있다. 대꾸도 안 하고 다음 질문을 던진다.
“다음. 이거 누구 보라고 쓴 거야?”
“너?”
“아니, 관객이 누구냐고?”
“아, 남녀노소지. 내 작품은 그런 거 가리지 않아. 아, 물론,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건 다 뺄거야.”
“참 나 원. 너, 우리한테 투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회사인지 알기는 하냐?”
“몽땅스트리밍이잖아.”
“그 회사가 뭐하는데인지는 아냐고?”
“OTT잖아.”
“으후… 거기서 어떤 콘텐츠가 제일 잘 나가는지 아냐는 소리야.”
“신선한 거 하려는 거지, 잘 나가는 거 하면 뭐 똑같은 거나 나오는 거지. 안 그래? 제대로 읽어본 거 맞아? 당연히 지금 게 더 재밌는데. 나머진 나중에 처리하면 되는 거고.”
“야, 있잖아. 이건 약속이야. 너와 나의 약속이고, 우리랑 투자사와의 약속이라고. 하기로 한 거 업뎃 된 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 다른 거 던지는 게 말이 돼? 이거 통과 못하면 우리 창업도 여기서 끝이야. 우선 10억은 갖고 시작해야 할 거 아니야?”
체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체다는 인지하지 못한다. 에이비는 카페 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좀, 살살. 조용히.”
체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간다.
“너 이럴 거면 나랑 같이 왜 하자고 했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아이디어로 다 준비 했고, 투자사도 좋다고 했고, 이제 잘만 가면 되는데, 왜 갑자기 난리냐고? 니 하고 싶은 거 하려고 나랑 같이 하자고 한 거야?”
“어째 좀 말이 심하다? 그럼 네가 쓰던가! 서포트는 못해줄 망정,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야? 넌 예전부터 그랬어. 칭찬은 1도 없고 맨날 부정적으로다가 피드백만 써댔지. 그러니 망했지, 안 그래?”
“네가 사업을 알기나 해?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주는 게 사업이 아니야. 정신 좀 차려. 말만 안 했지, 네가 써서 된 게 뭐가 있는데? 뼈빠지게 뛰어서 돈 붙여주면 예술 한답시고 다 날려먹고. 그래서 망한거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 이거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 아주 그냥 처음부터 깔려고 작정하고 온 거지? 질문하는 꼬라지를 보니 딱 그렇네. 야, 관두자. 내가 애초에 너랑 사업을 하기로 한 거 부터가 잘못이지.”
“약속이나 지켜. 일은 너만 하냐? 글만 쓰면 그게 그냥 저절로 사업이 되니? 애새끼야, 정신 좀 차려라.”
“뭐, 이 새끼가?”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은 이미 둘에게 집중되어 있다. 카페 매니저는 이미 둘의 테이블 앞에 와있고 내보낼 모양새다.
에이비가 자신의 작업물이 담긴 종이묶음을 낚아 채어 들고 먼저 일어서서 나간다. 체다는 한숨을 쉬며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하다. 파이널 피칭을 앞두고 최종 문서를 보내야 하는 기한은 바로 내일이었다.
체다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약속을 지키는 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은 굳건했다. 투자사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원안의 글들을 고치기 시작한다. 글쓰기에서 손을 뗀지 오래이고, 자신이 쓴 글이 아니다 보니 수정 방향에 갈피를 도무지 잡을 수가 없다. 몇 글자 쓰지 못하고 지우기를 수 백 번. 한 숨을 쉬기를 수 십 번. 결국 주방 찬장에 가서 위스키 한 잔을 타 소파에 털썩 앉는다. 스마트폰으로 채용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한다.
에이비는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신의 창작물의 신선함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그 외 제작의 제반사항들을 채워넣는데 도무지 손을 댈 수가 없다. 담배를 태우러 나가더니 한참을 돌아오지 않는다.
메일 발송 기한인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 업무시간이 다 끝나간다. 한참을 고민하던 체다는 컴퓨터 앞에 앉아 투자담당자에게 메일을 쓴다. 내용인 즉, 추가 업데이트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체다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집에서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간다. 이주일이 지나간다.
마땅한 채용 공고를 찾지 못해 우울하던 금요일의 저녁, 체다는 에이비에게 전화를 건다. 예상대로 받지 않는다. 술 마시고 있으니 생각나면 오라고 장소와 함께 문자를 남겨 놓는다. 소주를 한 병 비웠을 때 쯤은 오후 8시. 에이비가 두리번 거리며 술집으로 들어온다. 에이비는 슬쩍 체다를 확인하고는 이내 다음 병을 까서 소주잔 2개에 가득 채운다. 에이비가 체다의 테이블로 와서 앉는다. 둘은 말 없이 술잔을 비운다. 그렇게 한 병이 순식간에 비워진다. 에이비가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한다.
“여기요, 소주 한 병 주세요.”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소주가 하나 더 올 때 까지 적막이 흐른다. 다른 테이블은 왁자지껄한데도 이 테이블에서는 적막이 터져나간다. 에이비가 술잔을 바라본 채 둘 사이의 음소거를 깬다.
“연락 안 왔지?”
“어.”
“나 때문이지 뭐. 미안하다.”
체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에이비가 다시 묻는다.
“메일 안 보냈지?”
“보냈지. 죄송하다고.”
“나도 보냈는데.”
“뭐라고? 네 맘대로 보내면 어떡해? 언제 보냈는데? 목요일? 금요일?”
“목요일.”
“아, 씨, 나는 금요일에 보냈단 말이야. 대체 뭐라고 보낸 건데?”
“아니, 그냥 네가 안 보낼 거 뻔해서, 그냥 내가 대충 그거 뭐냐 예산이랑 그런 거 해서 보냈지.”
“그걸 네가 했다고? 어떻게 했는데?”
“그게 진짜 뭘 모르고 하려니까 안 되더라고. 그래서 그냥 니 꺼 숫자에 곱하기 2 해서 보냈어.”
에이비의 설명을 듣고 기가 차다는 듯 체다는 한숨을 내쉬며 소주를 들이킨다. 에이비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지? 나 때문이지?”
“솔직히, 뭐, 네가 새로 쓴 게 더 간지나긴 하지. 나도 그런 거 하고 싶지. 근데, 약속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뭐 친구끼리 한 약속도 아니고, 투자사랑 한 건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
“나도 알아, 알아.”
서로 한 잔 씩 따라주고 단 번에 들이킨다. 에이비가 자포자기한 듯 묻는다.
“이제 뭐할거야?”
“취직해야지.”
“갈 데는 있고?”
“이 나이에 갈 데가 있겠니.”
“난 아직도 애새끼인가봐.”
체다의 한 쪽 입꼬리가 어이 없다는 듯 씨익 올라간다.
“욕 쳐먹더니 정신 차렸나보네.”
“야, 그래도 너도 그 버릇 좀 고쳐봐. 뭐 전부 자기 방식대로, 자기 마음대로 해야하는 거. 이럴 거면 그냥 네 거 하는 게 맞아.”
“안 써지니까 그렇지.”
“뭐 쓰기는 하니?”
“남의 꺼 피드백 쓸 땐 청산유수로 키보드가 쳐지는데, 글만 쓰려고 하면 전부 무슨 대학생 글짓기 같이 되어버리더라고. 넌 어떻게 몇 시간 만에 그렇게 쓰냐?”
에이비는 너털웃음과 함께 소주 한 잔을 삼킨다. 그리고는 답을 이어간다.
“솔직히 네가 피드백 진지하게 해줄 줄 알았다.”
체다는 답이 없다. 소주 한 잔을 또 벌컥 들이키더니, 가방을 뒤적거려 종이 한 뭉치를 꺼내어 에이비한테 준다.
“뭐냐, 이거?”
에이비는 두 번 접힌 종이묶음을 펼쳐 본다. 목요일에 자신이 썼던 글에 빼곡히 파란색 텍스트로 피드백이 달려 있다. 에이비가 열심히 글을 읽는 사이 체다의 전화기에 알림이 울린다. 체다는 습관처럼 알림을 훑고 바로 잠금을 해제하여 메일 앱으로 들어간 뒤 받은 글을 읽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체다 프로듀서 님.
늦게 회신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보내 주신 최종 업데이트는 잘 읽어 보았습니다. 원안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저희가 보내 드린 피드백과 예산 관련 협의도 되어 있지 않아서 최종 보고를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초기 투자 검토 의향을 말씀 드렸을 당시, 에이비 감독님의 크리에이티브와 체다 프로듀서님의 제작의 시너지 효과를 보고 진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내 주신 원안도 아주 좋은 내부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투자를 결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콘텐츠 회사에 대한 저희의 투자는 내용이 아닌 “사람”에게 진행이 됩니다. 애초부터 투자 검토는 두 분을 보고 진행한 것이고, 지금도 두 분에 대한 저희의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약속 드린 전액을 회사에 투자할 수는 없습니다만, 추가 디벨롭을 보고자 1억 원을 개발비 명목으로 선투자하기로 내부 논의 결과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 내에 새로운 개발을 완성하시면 회사 투자 검토는 재개 가능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괜찮으시면 회신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ㅇㅇㅇ 드림
추신) 에이비 감독님의 새 버전도 좋습니다. 정확한 제작 계획도 함께 업데이트 부탁 드립니다.
사람을 죽였다. 우발적으로. 한 번도 저질러 본 적 없는 이 끔찍한 일을 내 손으로 행한 이유는 억울함 때문이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내가 뭘 그렇게 욕심 부리며 살았다고 이런 구렁텅이에 빠져 사리분간을 못하게 한 것이냐 말이다. 그러므로 난 정의를 행한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적절한 빌미와 감정상태를 제공했기 때문에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 대상이 있어서 꼭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냥 원망할 뿐이다.
그래도 복수는 했다. 무섭고 떨리고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더럽다. 굉장히 더럽다. 그래서 칼을 찌른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눈물이 난다. 내 몸에는 그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저 골목 뒷편에 쓰러져 있을 그 원수를 생각하니 차디찬 이 막바지 겨울공기도 전혀 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 손이, 내 심장이 더 차기 때문일 것이다. 영영 잃어버린 나의 세 가족들을 생각하니 분노가 차오른다. 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입에선 찬 공기를 애써 데우려는 입김만 나올 뿐이다. 흐느끼며 터져 나오는 나의 서릿발 가득한 한 숨이다.
“이원석 씨.”
쪼그려 앉아 흐느껴 울고 있다 깜짝 놀라 방어태세로 몸을 일으켜 쏘아본다.
“누, 누구세요?”
말없이 나를 한참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떤 살기나 독기나 따뜻함도 없다. 무슨 말을 하려는 의도조차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도 없는 오묘한 모습에 내 눈을 둘 곳이 없다. 나는 어떻게 이 만남을 모면할까, 대적할까, 도망칠까 궁리하며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왜, 왜요? 왜 그러시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 가서 눈을 감고 딱 백 까지만 세어보세요. 그럼 꿈에서 깰 겁니다.”
차분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한 외딴 자의 목소리가 끝나자, 그는 천천히 나를 지나 걸어 멀어져 간다.
잠깐을 생각하다 본능적으로 그의 뒷편으로 달려간다.
“저기요!”
그의 어깨를 손으로 툭 건드리는 순간 내 몸은 고꾸라져 바닥에 쳐박혔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
다시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내 방이다.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창에 달린 암막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몸을 돌려 1미터 정도 떨어진 책상 위에 시계를 보니 10시가 조금 넘었다. 무슨 요일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건지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 속에 남은 문장은 “조용한 곳”과 “백 까지 세어라” 뿐이다. 별 희한한 꿈을 꿨다 생각한다. 그 골목에서 직접 저질렀던 끔찍한 일이 벌써 소설 속 장면같이 느껴진다. 그런 일을 내 손으로 저질렀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 확신만큼 그 자가 내게 제안한 행동에 대한 음성도 또렷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자그마한 옷장 문을 열고 머리를 스르르 집어넣는다. 아직 밝은 하얀 빛이 눈으로 기어들어온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내 옷들 속으로 머리를 숙 집어넣고 한 숨을 크게 내쉰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괜히 볼을 한 번 꼬집어 본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다시 집중한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큰둥하면서도 심심한 목소리로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 구십 팔, 구십 구, 백!
질끈 감았던 눈을 스르르 열어본다. 여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퀘퀘한 내 옷 냄새는 여전히 코로 쑤시고 들어온다. 고개를 떨구매 헛웃음을 짓자 붉은 빛이 살짝 눈으로 삐져 들어온다. 다시 몸을 빼내어 옷장 문을 닫는다. 타각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은 옷장 문이 아니다. 방 문이다. 이상하여 곧장 뒤를 돌아보면 전구색 빛을 띄는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방이고, 3미터 앞 즈음에 책상이 있고, 그 뒤로 의자에 누군가 앉아 열중하여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건다.
“잘 잤어요?”
둘러보면 창문도 없이 조명만 있는 방에 별다른 향기도 나지 않는다. 평범한 상담실처럼 생겼다. 아직 지구에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원래 말이 없어요?”
두 마디를 듣고 나니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다. 그 현장에서 차갑고 고요하게 내 귀를 때렸던 그 목소리가 분명하다. 그 땐 몰랐는데 지금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여인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면접인데 묵비권 행사하실 건가요?”
그제서야 눈 앞에 있던 내가 앉아야만 하는 것처럼 생긴 의자가 보인다.
“누구…신지요?”
면접관은 귀찮다는 듯 책상을 뒤적거려 리모콘을 찾아 띡 하고 누른다. 그의 뒷 편으로 스크린이 지이잉 하며 천천히 내려온다. 한참을 기다려 스크린이 다 내려올 때 쯤 면접관은 그 타이밍에 맞춰 바퀴 달린 자신의 의자를 발로 굴러 스크린 옆으로 스르륵 비켜 앉는다. 영상이 재생된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지나가는 아주 빠른 타이밍의 핵심 단어로만 이루어져 있는 프레젠테이션 영상이다.
당신 인생? – 노답 – 여기 어디? – 인력사무소 – 이제 뭐해? – 서명 – 그 다음엔? – 일 해 – Q&A
마지막 Q&A 슬라이드에서 영상은 멈춘다. 같이 나오던 발랄한 음악도 멈춘다. 방어할 틈도 없이 정보를 먹게 되어버린 나는 어리둥절하다. 조금 화가 난다.
“뭐하는 거요?”
“채용이요.”
“저는 면접 보러 온 적 없습니다.”
“백까지 셌잖아요. 내가 시킨 대로.”
“안녕히 계십시오.”
뒤로 돌아 들어온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아니라 벽에 그려진 문 그림이다.
“어차피 돌아가봐야 맨날 울고 술병 나발 불고 할 거 아니에요. 그냥 서명하세요.”
이를 위 아래로 세게 물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나가는데 어디야?”
“나가는데 없는데요.”
주먹에 더 큰 힘이 들어간다. 몸을 뒤로 돌려 한 마디 해야겠다 싶어서 돌아서는 순간, 면접관은 어느새 내 코 바로 앞에 얼굴을 맞대고 서 있다. 깜짝 놀라 벽으로 물러선다. 면접관의 얼굴도 뒷걸음질 치는 나를 따라 어느새 벽까지 와 있다.
“뭐…요?”
“궁금해서 한 번 와봤으면 끝까지 얘기를 들어보셔야 할 것 아니에요, 이 인간아.”
잠깐 쫄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리 몸집도 크지 않은 여인이다.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의 몸을 밀치려 팔을 뻗는다. 어느새 내 팔은 뻗쳐진 채로 면접관의 몸에는 닿지도 못한 채 면접관의 손에 붙들려 있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면접관이 숨을 고르고는 나즈막히 말을 건넨다.
“흠흠. 자,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나를 놓아주더니 뚜벅뚜벅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뚫어지게 쳐다보며 질문한다.
“할 거에요, 말 거에요?”
일단 저 의자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의자 쪽으로 걸어가며 대답한다.
“저, 근데, 제가 지금 정말 뭣 때문에 면접을 보는지 모르겠어서 그렇거든요.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의자에 정자세로 앉자마자 면접관이 재촉한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 여기. 서명하세요.”
“저, 그래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문서라는 거에 서명을 하던 말던 할 거 아닙니까?”
면접관은 한숨을 푹 쉬더니 옆에 있던 인터폰에 버튼을 누른다. 삐이이이.
“어, 왜?”
“내가 이래서 위에서 정해놓고 보낸 인간은 안 받겠다고 했잖아!”
“응, 그래.”
“아이씨, 너 죽을래?”
“그건 인간들이나 죽는 거고. 끊는다. 화이팅!”
뚜우우우.
“우이씨! 으흠. 에헴. 헴.”
면접관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근엄을 차리려는 듯 자세도 고쳐 앉는다.
“살인 2회. 가족 잃음. 직장 잃음. 지명수배. 이래서 어딜 돌아가겠다는 거죠?”
그렇다. 나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대답할 수도 없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다시 서명할 서류를 내민다.
“자, 서명하세요.”
종이를 보니 글자는 어디에도 없고 중앙 하단에 커다란 서명란만 있다. 물끄러미 쳐다보면서도 지난 날들이 머릿 속에 영화처럼 흐른다. 모든 감각은 그 때의 사고와 그 후의 사건의 재생에 몰입되어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 있던 면접관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우물우물 들리기 시작해서 고개를 든다.
“(우물우물우물우물)요!”
“에..?”
“(우물우물우물)고요!”
“네?”
“천.사.시.켜.준.다.고.요!”
“네?”
다시 한 번 말을 하려다 짜증이 폭발한 면접관은 다시 인터컴 버튼을 누르고 반말을 하는 상대 직원에게 수화기 너머 쌍욕을 퍼붓는다. 분명히 ‘천사’라고 했다.